Blue Angel Wing Heart 케로베/ 베로스 자매 과거사 커미션~!

케로베/ 베로스 자매 과거사 커미션~!

OC*
2023.08.23

근사한 커미션을 작업해주신 커미션주 연후님은 이쪽!

https://kre.pe/Hd7i

 

연후님의 아델리펭귄 타입 | CREPE

연후님의 아델리펭귄 타입, CREPE에서 신청할 수 있어요.

crepe.cm

 

설정과 전체 스토리만 드리고, 나머지 살 붙여서 글로 만들어주시는 전체 글작업을 부탁드렸어요uu♥

 

주의: 근ㅊㅣㄴ, 인ㅇㅠㄱ, 살ㅇㅣㄴ, 성ㅈㅓㄴ환, 감ㄱㅏㄱ링크 소재가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mZ1FzTsIQQY 

 

케르베로스Κέρβερος
W. 연후

 

 

 

 


ACT.1 한 쌍둥이가 있다.

 

 푹신한 이불.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더운 벽난로의 열기. 태풍이 몰아쳐도 비 한 방울 새어 들어올 틈 없이 견고한 천장.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재즈 음악. 평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방에서 한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αδελ?”
 잠이 묻어 발음조차 불분명했음에도 아이는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물론 굳이 몸을 일으켜 찾을 생각은 없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뺨이 새벽이슬에 젖어 서늘하다. 발목과 허벅지에 은은한 둔통이 느껴진다. 폐부에 들어차는 공기는 눅눅하다. 아이는 제 뺨을 한 번 쓸어내렸다가 가볍게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이 동네는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침대를 흘긋한 아이는 옷을 탈탈 털고는 가볍게 짐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이 모든 행위가 관절을 움직이는 것마냥 익숙한 일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아이는 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뺨에 닿았지만 서늘하다는 느낌은 없다. 이미 차게 식어 있던 탓이다.
 잠시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기라도 하듯 고개를 비뚜름하게 내려놓은 아이는 이내 미소를 띠고 가방을 뒤적였다. 작은 손에 잡혀 나온 것은 발랄한 파우치에 걸맞지 않은 날붙이였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제 허벅지에 박아 넣는다. 마치 작은 의식과도 같은 행위에는 비명 한 조각 없었다. 대신 그 공백을 채운 것은, 희열이었다. 철퍽.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답지 않게 높은 신발에 닿은 진흙 소리인지, 아니면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가 마찰한 소리인지는 모른다. 알 이유는 없다. 행동이 달라질 리가 없으니까. 

 “αδελ….”
 아이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아이 자신조차 어떠한 말을 내뱉었는지 귀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말투만 떼어놓고 본다면 아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정도로 다정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음산함까지도 머금고 있었다. 만일 지나가던 이가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더해서 다정 아래 깔린 욕망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γεια, Κέρo.”
 가벼운 감탄사와 함께 내뱉은 단어는 직전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한때 이교도들 사이에서 죽음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한 잡귀의 이름과 닮은 발음이었지만, 분명 가로로 직선을 그었어야 할 아이의 입술은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아이는 이내 방향을 정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허벅지에서 흐르던 피는 언제 멎었는지 피부에 들러붙어 짙은 갈색 자국만을 남겨두었다. 온몸을 돌아다니던 피는 찰나의 공기조차 견디지 못한다. 아이는 그 자국을 보며 웃었다. 

 “Πάμε μαζί, αγαπητή….”
 미국의 어느 이름 모를 마을. 아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ACT2. 사랑하는 나의 동생


 어릴 적에는 누구나 제가 세상의 중심이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조금만 손을 대도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는 초심자의 특권. 하지만 케로베Κέρβε는 어릴 적에도 지금도 단 한 번도 세상의 중심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명이 아무리 빛난다 한들 태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빛만 내뿜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케로베의 곁에는 언제나 태양이 있었다. 딱히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거나 열정적이고 자애로운 사람인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는 면에서 그녀는 태양이 맞았다. 형제란 언제나 비교와 경쟁을 동반하는 사이. 특히나 쌍둥이라면 그것은 더 심해진다. 하지만 케로베는 단 한 번도 그런 쌍둥이 동생을 시기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케로베, 네 동생 말이야. 혹시 애인 있대?]
 [동생 소개 좀 해주면 안 되냐?]
 지나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의 동생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집안의 보물이었다. 으레 사람들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본다면 외모가 전부인 것마냥 구는 이들이 있다는 뜻도 된다.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불퉁한 표정을 짓던 동네의 경찰관이 인사 한 번에 미소를 짓는 것도, 말 한 번 섞어본 적도 없는 상급생들이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를 틈타 사물함에 선물을 몰래 두고 가는 것도, 그리고 심심찮게 들리는 호감 어린 감탄까지도 아마 같은 맥락이겠지. 동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것을 봐왔던 케로베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도 쉽게 생각했다.
 12학년의 겨울은 다른 겨울에 비해 그리 춥지 않았다. 대신 기록적인 폭설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더랬다. 그 덕에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기는 했지만 외출을 못 할 정도는 아니라 케로베는 산책이라도 할 겸 단단히 싸매고 편의점에 다녀왔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케로베는 마당 벤치에 앉아 눈을 꾹꾹 누르고 있는 동생을 마주했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눈이 많이 와서.]
 케로베를 빤히 쳐다보던 동생은 짧게 대답하고는 손을 뻗어 쌓인 눈을 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눈사람이 벤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케로베는 동생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눈 좋아했어? 추운 건 별로 안 좋아하잖아.]
 [막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냥. 델로스는 눈이 많이 안 왔잖아.]
 남매의 고향, 그리스의 델로스 섬은 지중해답게 따뜻한 기후로 유명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미국에 이민을 오기는 했지만 어릴 적의 기억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케로베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지만 동생은 가끔 델로스를 추억하곤 했었다. 
 [추운 건 질색이지만 말이야.]
 델로스의 날씨를 추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케로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은회색의 하늘에서 먼지처럼 흩날리는 눈과는 정반대의, 한때는 자연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다고 여겨졌던 담홍색의 머리카락. 보는 이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큼직한 눈과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 해를 거듭해갈수록 점점 더 완벽에 가까워지는 동생의 아쉬운 점이라면 늘상 담담하고 만사에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런 동생이 가족의 앞에서는 조금은 풀어진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케로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웃어, 갑자기?]
 [별거 아니야.]
 [됐어, 그럼. 들어가자.]
 그래,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다정하게 발걸음을 맞추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동생은 먼저 집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옮겼다. 자연히 케로베는 살랑이는 담홍빛 사이로 언뜻 보이는 가느다란 목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목덜미를 스친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간다. 가벼운 실내복에 대강 점퍼 하나만 입고 나온 탓에 실루엣이 노출된 몸은 더 이상 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곡선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케로베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피가 섞인 동생. 심지어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동생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아이는,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평생 보는 사람마다 미치게 만들며 살지 않았는가.
 [케로Κέρo?]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던 탓인지, 동생은 반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오직 동생만이 부르는 애칭에 케로베는 새삼스럽게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애칭의 장점은 무심코 부르더라도 사이에 애정이 숨어 있는 것. 케로베는 아무 일도 없는 척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응, 가자.]
 엄지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살살 쓸며 짓는 미소 같지 않게 해맑다. 자주 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또 그렇다 해서 밀어낼 만큼 불쾌한 행동은 아니라, 동생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본 순간 가슴을 관통하는 희열에 케로베는 깨달았다. 욕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욕망을 인지한 것이라고. 

 오빠는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ACT3. 여동생은 오빠를 사랑할 수 없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제가 세상의 중심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머리가 굵어지고 작은 사회에라도 나가고 나면 그 생각은 백중 백 꺾인다. 세상은 넓고, 저보다 우월한 이는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로스βερος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상대를 판단하는 척도는 여러 가지다. 지능. 사회성. 성실함. 말투나 눈빛. 그렇다고는 하나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외모다. 그 최우선의 가치가 제 손에 있다는 것을 베로스는 너무 일찍 깨달았다. 여타 부수적인 것이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을 굳이 판단하는 이보다 얼굴 한 번 더 보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뿐이다. 이런 외모를 지닌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베로스는 인지했고 받아들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베로스는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응, 가자.]
 그랬기에 이상함을 알면서도 베로스는 오빠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본인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를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안마를 해 주는 척 목덜미를 주무르거나, 담요를 덮어주며 허벅지를 진득하게 쓰다듬는 것 정도는 대강 넘어갈 수 있었다. 그저 가진 자의 자비이자 혈육에게 주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모른다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였다. 둘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관련해서 물어볼 것이 있었던 탓에 베로스는 오빠의 방을 찾아갔었다. 들어가지는 않았으니 갔다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그렇다니까. 야, 애초에 다 커서 서열 잡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 그것도 쌍둥이를.]
 [필요한 일이 있다고.]
 [그냥 설설 기어서 콩고물이나 얻어먹지 그러냐. 네 동생 진짜 예쁘잖아. 옆에 얌전히 붙어 있으면 되는 걸 왜 굳이 위에서 찍어 누르려고 하냐?]
 [시끄러워. 끊어.]
 딱히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화로 말미암아 친구였겠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말의 내용이었다. 서열. 서열이라. 평범한 남매 사이라면 자연스러울 단어였지만 둘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연상되지 않을 단어였다. 더구나 굳이 있다면 서열의 위는 베로스 자신이지 오빠가 아니었다. 꺼림직한 기분에 베로스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왔었다.

 빈말로도 나쁘다 할 수 없었던 둘의 균열은 그때부터였다. 같은 양의 공포라 해도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느끼는 공포는 다른 것과 결이 다르다. 어느 날부터인가 상비약통 한구석에 자리한, 오빠의 이름이 쓰여 있는 수면제. 방을 지나갈 때 한 번씩 들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 화장실에서 이따금 나는 비릿한 내음과 섬뜩하리만치 가라앉은 다정했던 눈빛까지. 물론 베로스는 오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오빠가 바라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적어보자 할 때 쓸 세 번째 이름 정도의 사랑.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그랬기에 방법을 찾아 헤맸다. 제가 보기에도 괜찮은 외모의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아예 마주칠 일이 없도록 동선을 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는 그대로였다. 아니, 더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그렇게 지내기를 몇 주. 병 속의 수면제 한 알이 줄어든 날. 그리고 바꿔치기한 우유를 대신 마신 어머니가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든 날. 베로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을 어떻게 인간이 해결할 수 있을까. 베로스가 악마를 찾아간 것은 어쩌면 12학년의 겨울날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라비니아의 딸아. 찾아온 이유는?]
 눈에 흰 천을 감은 악마는 튜닉을 입어 넓은 어깨와 단단한 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고운 선과 입매는 분명 여성체의 것이라, 보는 사람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베로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쌍둥이 오빠가 내게 욕정 해요.]
 [흔한 일이지.]
 [그가 내게 발정 난 개처럼 굴지 않게 해주세요. 악마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악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스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악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어려운 소원은 아니구나. 그래, 지혜를 나누어주마.]
 악마의 긴 검지가 베로스의 이마를 톡 치고 지나갔다. 이전과는 다른, 공명하는 울림의 소리가 귀 대신 이마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소리와도 같았다.
 [여자를 먹여라. 네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테니.]
 충격적인 말이어야 했을 터다. 하지만 베로스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했다. 그것이 드러났는지 악마가 입가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모든 지혜에는 대가가 있는 법. 라비니아의 딸아, 너는 오직 네 안위만을 위해 다른 이의 욕망을 갈취하려 한다. 이제 몸마저도 빼앗으려 하겠지. 내 예언하노니, 너는 죽지 않고 늙지 않은 채 그들의 고통을 머리에 끼얹고 살아가리라. 그 어떤 날붙이도 너를 해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시간도 널 범할 수 없으리라.]
 이것을 저주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베로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치더라도 바로 회복되는 신체가 어떻게 저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이라면 제 주위의 이들이 죽어가 홀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겠지만 베로스는 달랐다. 그녀의 주위에는 늘 새로운 사람이 가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축복이 아닌가. 떨떠름해 하는 베로스를 보며 악마는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가거라. 이미 저주는 시작되었으니.]
 […다시 찾아오게 하지 않기를 바라죠.]
 악마를 앞에 두고도 사그라지지 않는 오만함. 오페라의 막이 내려가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여느 관객처럼 악마는 크게 손뼉을 쳤다. 하지만 베로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이룬다. 누군가는 조롱하고 누군가는 비난할 길이라도 걷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베로스 자신뿐이니까.

 그렇게 베로스는 한 여자를 죽였다. 이름 모를 한 노숙자였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베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첫 살인은 힘겨웠다. 어느 정도까지 칼을 깊숙하게 찔러야 죽는지 모르니 상대의 반항을 견뎌야 했고, 끽해봐야 과학 교과서에 쓰여 있는 인체 해부도 정도나 알던 탓에 고기를 분리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무엇보다 피투성이인 외관과 구역질 나는 악취는 베로스의 미 감각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죄책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베로스는 해냈다. 어차피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오빠에게 먹일 고깃덩이일 뿐이니까.
 처음 먹일 때는 무엇인지 알까 봐 두려웠다. 두 번째에는 요리에 집어넣는 요령이 생겼다. 세 번째부터는 냉장고 한구석에 다른 고기와 함께 둘 수 있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베로스가 느낀 것은 오로지 조바심이었다. 결과가 제 노력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이대로 끝없이 사람을 죽이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 제 음식에 들어있을 수면제를 피해야 한다는 조바심. 베로스는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악마가 시킨 대로 오빠에게 고기를 먹였다.

 그리고 어느 날. 보관해두었던 고기가 다 떨어졌던 날. 다음 대상을 정해 밤늦게 외출을 하려던 베로스는 오빠의 방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췄다. 평소의 오빠는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문 과묵한 성격이다. 그런 그의 방에서 깨지는 소리라니. 하필 한 명 분량을 전부 먹인 이날에. 베로스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케로?]
 낯익은 방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종종 드나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깨진 손거울을 들고 주저앉아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제 얼굴을 숨기려 애를 쓰던 그녀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팔을 내리고 더듬더듬 말했다.
 [베, 베로.]
 베로스는 얼어붙었다. 본래도 그리 건장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얇은 선. 여리여리한 목덜미와 약간 봉긋하게 솟은 가슴께. 그리고 가늘고 높게 흘러나오는 제 애칭. 오빠가 여자가 되었다. 베로스의 낯에 희열이 스쳤다. 

 

 

 

ACT4. 언니는 여동생을 사랑할 수 없다.


 [올 줄 알고 있었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아. 아니, 라비니아의 딸인가.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웃음을 참는 듯한 장난스러운 말투. 중성적인 목소리. 눈에 감은 흰 천. 악마를 눈앞에 둔 케로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케로베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피로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의 그 감각. 영혼이 다른 몸에 들어간 듯한 감각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참지 못하고 거울을 깨뜨렸음에도 조각은 비웃듯 제 얼굴을 비춘다. 

 -케로?
 무엇보다, 그 광경을 제일 처음 목격한 사람이 동생이라는 것이 가장 최악이겠지. 케로베는 고개를 흔들어 그때의 기억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케로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온 이유는 알고 있나 봐?]
 [지금에야 악마로 불리나 나는 본디 예언자로 이름을 알렸던 이. 당연한 일이다. 네가 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여자가 된 이후로 케로베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이상한 것이라도 주워 먹었는지 기억을 더듬기도 했고, 책이든 인터넷이든 뒤져가며 하루아침에 성별이 뒤바뀐 사례가 있는지 물색하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의 끝에 케로베가 찾은 것은 방법이 아닌 한 조각의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서재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지금은 인터넷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설화의 인물. 일곱 차례나 성이 뒤바뀌는 경험을 했던 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Τειρεσίας.

 지금은 주류 신을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마로 전락한 그 이름을 보자마자 케로베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다. 그런 케로베를 가엾다는 듯 바라본 악마, 테이레시아스는 한쪽 손을 쭉 뻗었다.
 [자, 아이야. 원하는 것을 말하라. 그리고 그 대가를 내게 다오.]
 저 손은 고통에서 자신을 구원할 동아줄일까. 아니면 잡자마자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늪일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오빠는 여동생을 사랑할 수 있다. 감히 그녀를 끌어안고 속박해 아가리를 들이밀 수 있다. 모두가 우러르는 그녀를 제 발아래 두고 심연까지 헤쳐 들어가 제 욕심을 그득하게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언니는 여동생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남자로 돌아가고 싶어.]
 [예상대로구나.]
 [테이레시아스. 당신이라면 당연히 가능하겠지.]
 악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테이레시아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검지를 케로베의 이마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남녀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듯한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남자를 먹어라. 이것이 네게 내리는 나의 지혜다.]
 역시 형제라는 것일까.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케로베는 미소를 지었다.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그 얼굴에 테이레시아스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비니아의 딸,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아. 너는 방법이 사라졌음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피가 섞인 이를 욕정한 네 원죄가 네 혈육을 고통에 처박았으니, 너는 평생 그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리라. 오직 죽음만이 너의 고통을 멈출 수 있으리라.] 
 악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에 이질적인 감각이 드는 것이 느껴지자 케로베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느끼는 감각은 분명 하나였으니, 느껴지는 감각은 두 개였다. 바닥을 더듬더듬 짚으며 들었던 말을 정리하고 나서야 케로베는 깨달았다. 내가 고통 속에 밀어 넣은 나의 혈육. 그 고통을 대가로 나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던 나의 혈육.

 동생이 내게 여자를 먹였다.

 동생이 나를 여자로 만들었다.

 도망쳐야 한다. 케로베는 벌떡 일어섰다. 여자를 먹지 않는 동시에 남자를 먹어 다시 남자로 돌아가야 한다.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되찾아서 그 아이의 위에 올라서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케로베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테이레시아스는 킥킥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닿을 곳 없는 인사만이 허공에 남았다.

 

 


ACT5. 눈이 흐려지고, 허리가 아파지고, 몸이 식어가겠지. 

 

 오빠가 사라졌다. 베로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질적으로 몸에 느껴지는 감각이 생긴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남자로 돌아가려 무진 애를 쓰더니 악마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악마를 만났으니 언젠가는 남자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때 가서 여자를 또 먹이면 되는 일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은 안전했기 때문이다. 불로불사와 평범한 인간이 시간을 두고 싸우면 누가 이길지는 뻔한 일이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더랬다.

 어느 날 멀찍이 있던 간판을 읽으려 했다. 평소라면 분명 뚜렷하게 보였어야 하는 그 글씨가 잘 읽히지 않아 베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심해 초점이 흔들리는 듯한 감각. 눈의 수명이 닳아가는 듯한 감각. 제 몸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그 느낌에 베로스는 불쾌해졌다. 하지만 평생을 두려움에 시달리는 대가로 이 정도의 불쾌함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또 어느 날에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허리에 찌릿함을 느꼈다. 발을 잘못 디딘 것도 아니고, 힘을 잘못 준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유연하게 접혀야 할 허리와 무릎이 이따금 삐꺽거리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분명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그제서야 베로스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계획된 저주다. 악마를 찾아갔던 그 날 저주가 저주가 아닌 듯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이야 약간의 불편함뿐일 터다. 아직 둘은 스무 살 남짓 정도. 일생에서 가장 건강할 나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오빠에게 시간이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럽게 눈이 흐려질 테고, 척추가 굽고 허리가 아파올 것이고, 관절이 닳아가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통증이 밀려올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엮여 태어난 쌍둥이답게, 그렇게 설계된 저주에 베로스는 머리를 짚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대로 오빠가 점점 늙어가다가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래서 이 지구가 그 몸을 좀먹어가는 내내 제 몸이 썩어가는 감각만 그대로 느끼게 된다면. 처음 악마를 찾아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공포가 엄습한다. 제 고통을 덜기 위해 벌인 모든 행동의 결과가 또 다른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현실. 되돌려야 한다. 베로스는 과거를 짚어나갔다. 그리고 저주의 본질을 그제야 알아냈다.

 여자를 먹은 오빠는 여자가 된다. 남자를 먹은 오빠는 남자가 된다. 그렇다면 불로불사의 인간을 먹은 오빠는 당연히 불로불사가 된다. 베로스가 할 일은 간단했다. 불로불사의 여자를 먹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누군가에게는 구하는 것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터였지만 그녀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베로스는 처음으로 오빠를 찾아 나섰다.


*

 

 길고 탐스러운 담홍빛의 머리카락과 밤하늘을 담은 듯한 어두운 빛의 눈동자. 싸구려 모텔의 깜박거리는 전깃불 아래에 누워 있을 여자치고는 퍽 보기 드문 얼굴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니 하루뿐일 관계에 진득하게 후희까지 즐길 마음이라도 든 것이겠지. 버석버석한 이불 아래에서 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히죽 웃으며 여자의 옆구리에 손을 올린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쳐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운 여체를 만지작거렸다.
 [발정 난 거 티 내지 말고 얌전히 잠이나 자.]
 [존나 비싼 척하네. 홈리스 거지 년이.]
 [γάμα σε, κάθαρμα.]
 어투를 보니 욕인 듯하지만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욕쯤이야 앙탈로 봐줄 마음은 충분했기에 남자는 씩 웃으며 여자를 깔아뭉갰다. 이대로 한 번 더 하고 나가 친구들에게 제 무용담을 들려주면 면깨나 서겠지.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 어?]
 눈앞의 여자가 둘로 보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어질거리던 시야를 바로잡으려 머리를 짚던 남자는 그대로 침대 아래로 고꾸라졌다. 여자는 발로 그 남자를 밀어내고는 아래에 던져두었던 옷을 꿰어 입었다. 감전이라도 된 듯 부들부들 떠는 남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여자가 네 얼굴 보고도 호의적이면 의심을 해야지. 멍청한 새끼.]
 여자가 가방을 뒤적이자 남자는 눈을 간신히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15인치 정도 길이의 칼이었다. 용도가 명확한 그 도구를 능숙하게 잡은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달리 말은 필요가 없었다. 낡아빠진 모텔에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것쯤이야 뉴스거리도 안 되니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은 남자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칼을 뽑아내고 적당히 해체를 시작했다. 우선은, 다리부터.

 푸욱,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여자는 순간 비틀거렸다. 분명 제가 손에 쥐고 있던 칼은 보기도 싫은 남자의 허벅지에 박혀 있었다. 그러니 제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통증은 제 것이 아닐 터다. 제 것이 아닌, 하지만 분명 제 뇌를 파먹는 통증에 여자는 새하얀 허벅지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잠금장치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낡아빠진 모텔의 문이 열렸다.
 [안녕.]
 공간과 상황. 두 가지와 모두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미소에 여자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 여동생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처음 본 여동생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마음이 울렁거리지도, 아랫배가 찌릿해지지도 않는다. 침이 고일 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그 몸은 이제 옆에 덩그러니 놓인 사체만큼 감흥이 없었다. 타의에 의해 거세된 제 욕망과 마주한 여자는 허벅지의 통증도 잊고 벌떡 일어섰다. 베로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악!]
 푹, 푹, 푹, 푹. 근육과 쇠붙이가 들러붙은 것을 떼어내는 진득한 소리가 계속해서 방 안을 채운다. 베로스는 허벅다리 안쪽의 여린 살을 깊게 찔렀다. 제게도 통증이야 같은 양으로 밀려 들어왔지만, 예상한 통증과 예상치 못한 통증은 느끼는 바가 다르다. 견디지 못하고 여자가 쓰러지자 베로스는 웃었다.
 [한숨 자, 케로.]
 미리 준비해 뒀던 전기충격기로 여자를 기절시킨 베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 팔뚝 살을 뚝 잘라냈다. 피가 몇 방울 떨어지기 전에 원 상태로 회복된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베로스는 살을 적당히 잘라 기절한 여자의 입에 넣고 목을 문질렀다. 기르는 동물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듯 덤덤하게.

 멀찍이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베로스는 승리에 도취한 환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남매는, 또 어쩌면 자매는, 다시 만났다.

 

 


ACT6. 여동생은 언니를 사랑할 수 있다. 

 

 베로스는 소파에 누워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여자인 오빠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사람의 외모에 절대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리지 않는 베로스의 눈에도 이 정도이니, 웬만한 할렘 가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남자로 돌아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신을 따라다녔겠지만.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도망을 칠 생각만 하는 오빠를 보며 베로스는 킥킥 웃었다.

 이대로 살면 되겠지. 어차피 감각이 공유되어 있으니 그가 아무리 도망쳐봐야 베로스의 손바닥 안이다. 물론 육탄전으로 나온다면 녹록지 않겠지만 정신과 몸의 괴리가 있는 필멸자와 제 몸으로 평생을 살아 온 불멸자 사이의 싸움이라면 승패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특히 후자가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면 더더욱.

 오빠는 도망을 쳤고 베로스는 그를 따라갔다. 다시 기절을 시켰고 제 살을 먹였다. 어느 날은 바로 찾아갔지만 또 어느 날에는 여유를 가지고 산책이라도 가듯이 그를 쫓아갔다. 놀린다기보다는 서두를 이유가 없던 탓이었다. 하루 만에 한 사람 분량을 배 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을 테니 유지만 시켜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본래 관계라는 것은 더 절실한 쪽이 언제나 급해지는 법이었다.

 그래, 절실한 쪽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에는 참 평범한 날이었다. 날도 흐리지 않았고, 바람도 한 점 불지 않았으며 그렇다 해서 햇살이 따사로운 날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제가 느낀 것이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같이 가자니까, 꼭 혼자 먼저 가.]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오빠를 보며 베로스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귀찮고 번거롭지만 매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과와도 같았으니 특별히 생각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여상히 기절을 시키고 살을 먹이기 위해 오빠의 몸을 돌린 순간, 베로스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담홍빛 머리카락은 익숙한 것이었다. 더 길고 숱이 많았지만 제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정리된 가는 선과 짓눌리듯 다물린 입이 평생을 보아 왔던 오빠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래. 제 것과 닮았다.

 여자를 먹으면 여자가 된다. 남자를 먹으면 남자가 되며 불로불사의 몸을 먹으면 불로불사가 된다. 그렇다면 베로스 자신을 먹으면 당연히 자신을 닮아가지 않겠는가. 당연한 일이었지만 베로스는 지금에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로스는 아름다웠고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직 자신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닮은 이가 세상에 생긴다. 언감생심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제 혈육은 자신을 닮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아, 세상에.]
 답지 않게 얼빠진 소리를 낸 베로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항상 세상의 중심이 저였기에 너무도 쉬웠던 삶은 재미도 자극도 없었다. 그랬기에 눈앞의 이 아름다운 거울을 본 순간 베로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올라오는 듯 어지럽다. 갑작스럽게 한기가 올라오고 손이 차가워진다. 언뜻 보면 처음 학교에서 단상에 올라갔을 때의 긴장감과 닮았다. 또 언뜻 보면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의 반응을 기다려야 할 때의 조바심과 닮았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중독적이었다.

 베로스는 눈앞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살아가던 환경을 생각한다면 거칠 것이 뻔한데도 왜인지 부드러웠다.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모아준 그녀는 살짝 웃었다.
 [아, 정말이지….]
 불쾌해. 불쾌하기 짝이 없어. 입 안에 한가득 문 꿀 향기가 메슥거린다. 하지만 그만큼 달았다. 처음 사람 맛을 본 짐승이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은 본능이다. 베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갖고 싶다.

 곁에 두고 싶다.

 제 손에 그러쥐고 싶다.

 잃어서는 안 된다.
 […언니.]
 그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어야 했다. 제 쌍둥이 혈육은 여자다. 예전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음에도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이 말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베로스는 고개를 숙여 기절한 언니의 입에 제 입술을 겹쳤다. 제멋대로 쑤셔 넣었던 것 탓에 피비린내가 났다. 베로스는 웃었다. 사람 맛을 보았다. 이제 달려든다. 그것이 본능이었다.

 

 


ACT7. 한 쌍둥이가 있다.


 [xxx호에 묵는 쌍둥이 여자애들, 봤어?]
 어느 도시 한 구석의 낡은 호텔. 특별할 일도 손님도 없는 그 호텔은 오랜만에 소란스러웠다. 벨보이의 말에 데스크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감정 표현이 많은 이였지만 감안해도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진짜 예뻤지. 연예인 아냐?]
 [그 머리카락 색인데 연예인이면 모르겠냐.]
 [왜 굳이 여기 왔을까? 딱히 볼 것도 없는 곳인데.]
 [그냥 여행하다가 왔나 보지, 뭐. 언니 쪽이 먼저 온 걸 보니까 급하게 잡은 것 같던데.]
 오래간만에 온 특별한 손님에 이야기꽃을 피우던 직원들은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긴 머리카락의 여자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짐을 챙겨 나온 것을 보니 체크아웃인가 싶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지만 정작 여자는 데스크를 지나쳐 문을 나가버렸다. 다급한 걸음이었다. 
 [엥? 체크아웃도 안 하고 어디를 간대.]
 [동생 쪽은 안 나갔잖아. 곧 나오겠지.]
 손님에게 과하게 관심을 쏟는 것은 호텔 직원의 도리가 아니다. 직원들은 그저 그렇게 넘겼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담홍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간단한 짐과 호텔 키를 데스크에 내려둔 여자는 말했다.
 [체크 아웃이요.]
 [아, 이제 하시는군요? 어제 언니분께서 나가셔서 바로 체크아웃하실 줄 알았는데.]
 지나가듯 건넨 말이었음에도 여자는 꽤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미소가 퍽 아름다워, 직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 데스크에 올려두었던 짐을 어깨에 멘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다음 여행지에 먼저 가 있겠다더라고요.]
 [여행하시는구나. 자매가 사이가 좋은가 봐요.]
 [그런 셈이죠.]
 데스크 직원이 예쁜 손님과 대화하는 것이 부러웠는지 벨보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보는 이에 따라 무례할지도 모르는 행동이었으나 여자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벨보이가 물었다.
 [여행하시는 것 치고는 짐이 가벼우신데, 얼마나 계획하고 계세요?]
 [아, 음….]
 여자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숙였다. 여전히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여자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한, 500년?]
 [아하하, 농담도 잘하시네. 조심해서 가세요.]
 직원들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넨 여자는 가벼운 걸음으로 호텔 밖에 나가 숨을 들이켰다. 도시의 습하고 탁한 공기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이번에는 산이구나. 나쁘지 않지.
 [내기할까, 언니. 누가 먼저 지칠지.]
 케르베로스Κέρβερος. 살아있되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우리. 그렇다 해서 지옥에 들어갈 수도 없는, 오직 문턱에 턱을 괴고 혀를 내민 채 영원히 기다려야 하는 우리. 그 어떤 시간도 범할 수 없는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짓누르고 옥죄며 살아가겠지. 여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행의 시작이었다.

 

 

더보기

커미션 신청 내용이었던거▽

 

이걸 저렇게 만들어줌...............

글커미션이라는건 정말짱이구나..............

최고의커미션주.............